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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29
Alpinist Name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머메리는 1855년 잉글랜드 캔트주의 도버에서 태어났다. 몸이 허약했던 그가 도버 해안의 암벽에 흥미를 느껴 등반을 시작한 것은 16세때부터였다. 등산가로서 그를 영국의 유명 암벽등반가로 일컫게 한 것은 1879년 마터호른의 쭈므트 능 초등, 1880년 마터호른의 푸르겐 능, 꼴 디 리옹, 에귀 데 그랑샤르모, 1881년 에귀 디 그레뽕, 에귀 베르뜨 남서면, 1887년 토이펠스그라트 등을 연달아 초등한 업적에 의해서다. 하지만 1895년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과감히 스포츠 등산을 제창하고 나오면서 그는 '근대 등산의 비조', '등산사의 일대 반역아'로 불리기도 했는데, 머메리즘이 탄생되면서 알피니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이다. 오늘날도 머메리즘은 알피니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알피니즘은 그 어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알프스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산악운동이다.물론 알피니즘이라는 개념 혹은 이념이 생성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알프스에 올랐다. 종교인, 상인, 목동, 수정채취업자, 수렵꾼 등이 그들이다. 이들과 알피니스트의 차이는 그들이 왜 산에 오르는가 하는 목적에서 갈라진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 혹은 생활의 방편으로서 산에 올랐다. 그러나 알피니스트들은 다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알피니즘이란 곧 '고도의 위험이 농축되어 있는 유희'이자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근대적 알피니즘의 효시로는 1786년의 몽블랑 초등을 꼽는다.

이때의 초등자로서 등반사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사람들이 샤모니의 의사 미셸 파카르와 수정채취업자 자크 발마인데, 사실은 제네바의 과학자 드 소쉬르가 내건 현상금을 노리고 한 등반이었으므로,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알피니즘을 구현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들의 초등소식이 전해 지자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까지 알프스의 험준한 고봉들은 죄다 '악마의 거처'이며 '용의 소굴'로만 여겨져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들의 쾌거로 말미암아 그 중세적 환상이 깨진 것이다. 이후 1800년까지를 여명시대, 그리고 1840년대 까지를 개척시대라고 부른다.
등반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것은 1854년 알프레드 윌스의 베터호른 초등이다.

1857년에는 세계 최초의 등산단체인 '알파인클럽(영국산악회)'이 결성되어 알프스의 초등경쟁에 불이 붙는다. 기록에 의하면 이후 약 10년 동안 4,000m급 고봉 60개를 포함하여 모두 149개의 알프스 봉우리들이 초등되었다니 알피니즘이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알피니즘의 황금시대는 1865년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으로 마감된다.

마터호른 초등이 워낙 비극적인 결말로 맺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알프스에서는 올라갈 봉우리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10여년에 걸친 '좋았던 옛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이제 유럽등반계는 은의시대로 접어들어 안이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돌연 신세대의 반항아가 나타나 알피니즘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그가 바로 알프레드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 Mummery, 1855-1895)이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로 올라라!"

16살 때부터 영국 도버해안의 암벽에서 바위에 달라붙곤 했던 이 남자는 타고난 반항아요 모험가였다.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다 올랐다고? 그건 당신들 얘기일 뿐이야.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길로 모든 봉우리들을 다시 오를 거야. 당신들은 그저 어떻게든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방식-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오를 거야! 훗날 '머메리즘(mummerysm)'이라 명명된 이 남자의 등반관은 이것이다. 어떻게든 오르기만 하면 다가 아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등반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오르느냐'이다. 굳이 보다 어려운 루트를 골라 오르는 것이야말로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이전까지의 등반사를 지배해온 '등정주의(peak hunting)'가 폐기되고 '등로주의'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영국초판, 1895)는 이 호쾌한 산사나이가 남긴 유일한 산악문학저서이다. 그가 그저 책상에 앉은채로 이렇게 새된 목소리를 내질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악계에 당당히 발표했고 몸소 그런 방식의 등반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시대를 앞서 나갔다. 등반가로서의 머메리를 만천하에 알린 것은 1879년 마터호른의 즈무트능선 초등. 머메리의 출현 이후로 이제 더 이상 '마터호른에 올랐다'는 것 자체는 알피니스트의 훈장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어떻게 올랐느냐이다. 머메리는 너무도 험준해 당시로선 아무도 달라붙으려 하지 않았던 즈무트능선을 개척등반하여 정상에 섬으로써 그의 사상에 반발했던 많은 산악인들의 입을 쩍 벌려놓았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제1장은 당연히 이 초등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의 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제2장은 1880년 마터호른 푸르겐능선 초등, 제3장은 역시 같은 해의 콜 뒤 리용 초등, 제5장은 에귀 데 샤르모 초등…그런 식이다. 특이하게도 제4장은 그와 동행한 머메리부인이 썼다. 1887년 토이펠스그라트의 초등기록이다. 그 험준한 봉우리를 아내와 함께 등반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머메리의 파격적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19세기 말이다. 알피니즘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다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는 것은 미친 짓으로 보였으리라. 그런데 그것도 길이 안 나 있는 곳만 골라서, 게다가 조신하게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할 마누라쟁이까지 동반하고 오른다고?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빤하다. 필시 악마와 내통하고 있거나 머리가 돈 자식이 아니면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머메리의 등반기록을 읽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다. 도처에서 상식과 충돌하고 페이지마다 즐거운 반란이 넘쳐난다. 게다가 머메리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까지 출판한 인텔리이기도 하다. 정규적인 인문교양을 착실히 쌓은 영국 부르조아답게 워즈워드와 테니슨의 시를 읊조리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리스 신화에서 구약과 신약을 거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까지의 성전(聖典)들까지 들먹이니…

한 마디로 문학적 가치도 높은 글이어서 제대로 된 고전을 읽는 맛이 난다. 독자를 바짝 긴장시키는 상황에서도 태연히 유머를 주고 받으며 동료들과 함께 껄껄대는 모습은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등반가요 사상가인 머메리의 풍모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머메리즘의 본질을 설파하는 유려한 문장들이 책의 제14장 '등산의 기쁨과 벌칙'은 여타의 장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개별 봉우리의 산행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등반철학을 피력한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머메리즘의 본질을 논한 글들이 많이 쓰여졌지만 아무래도 원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머메리 특유의 유머와 풍자 그리고 호방한 기개가 행간마다 넘쳐나는 명문이다.

우선 그가 얼마나 낭만적인 동시에 육체적인 인간인지를 살펴보자.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알피니스트들이 체험하게 되는 존재에 대한 심미안을 논한 대목을 보자.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가이드 없이 산행한다는 것(guideless climbing) 역시 등로주의와 더불어 머메리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다. 그는 가이드를 따라 그저 가축처럼 내몰리며 오르는 산행에서 도대체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은 값비싼 행락이요 고역이며 인간의 자존심에 대한포기에 다름아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손으로 잡을 자리, 발로 디딜 곳과 더불어 올라가는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머리 속에 환히 그릴 수 있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바위 부스러기의 긴 사면을 허덕허덕 올라가는 것은, 향수와 화장기름에 젖은 유행복에 풀 먹인 린넬셔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기차로 체르마트에 내려서는 줏대없는 인간들이나 할만한 일이다."

희대의 반항아, 낭가파르밧에 지다 머메리는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인간이다. 어쩌면 그가 위험한 인간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자신의 등반철학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마지막 장은 마치 유언과도 같은 한 문장으로 맺어져 있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머메리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에 오르기 위해 떠난다. 그는 두번의 등정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친구들과 헤어져 두 사람의 구르카병사들을 이끌고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보인 마지막 모습이다. 머메리는 그렇게 낭가파르밧 최초의 희생자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령 낭가파르밧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조금도 없소."

머메리는 말한다. 길이면 가지 말아라. 19세기의 신세대 반항아가 남긴 이 한 마디는 알피니즘의 골간을 새로 세웠고 등반사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20세기의 알피니스트들은 그 누구도 머메리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수 없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를 찾아 곤란한 등반을 추구하는 것이 곧 알피니즘의 본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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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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