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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산들】 이즈미 세이치 지음.2021년. 최진희. 김영찬 옮김/ 한국산악회
작성자 이용대
등록일 2021-03-21 조회수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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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아득한 산들이즈미 세이치 지음.2021. 최진희. 김영찬 옮김/ 한국산악회

. 한국산악회 이용대.

 

이 책의 저자 이즈미 세이치(泉靖一)1915년 동경 조시가야에서 태어났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교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12세 때 조선으로 이주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등산 활동을 한 산악인이자 문화인류학자다. 비교적 건강하지 못했던 그는 요양 차 금강산 요사체(寮舍寨)에서 가족들과 휴양을 하면서 산과 첫 해후를 한다.

그 후 경성 주변의 암벽을 이웃집 드나들듯 오르던 그는 경성제국대학 국문과(일문학과)에 진학하여 산악부를 창립한다. 그의 학창시절은 산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 근대등반이 개화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처음 등산을 시작한 이즈미는 1945년 일제패망 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북쪽의 백두산에서부터 남쪽의 한라산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산과 암벽을 오르며 그 행적을 회고록으로 남긴다. 이즈미세이치(이하 이즈미)의 기록은 한반도에서 근대 스포츠적인 알피니즘이 싹트던 시기에 이루어진 기록으로 근대등반사의 단면을 조명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이다. 하지만 패전 후 조선을 떠날 때 산행일지. 사진 등의 자료를 없애 버렸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해 이 책을 집필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기 등반자료들을 살펴보면 이즈미와 이이야먀 다츠오(飯山達雄.이하 이이야마)등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그만큼 그들의 활동 폭이 넓었음을 의미한다.

 

산과의 만남

이즈미가 처음 등산을 시작했을 때는 일본에서 유입된 스포츠 알피니즘의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경성근교 산들은 암벽등반을 하기에 적합한 연습장이 많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렵겠지만, 조선에서 스포츠 알피니즘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북한산 인수봉 초등정이 계기가 됐다고 이즈미는 말한다.

한국 근대 등반사 연구의 중요 관건이 되는 인수봉 초 등정에 대해서 그는서울 근교의 산들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만약 내 기억이 맞다 면 초 등반은 임 아무개씨(林茂.한국인. 일본명은 하야시시게루)일행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구체적인 초등년도와 동행자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이즈미 앞에는 이런 시대, 그리고 이러한 산들이 솟아있었다.

그는 일요일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서울근교 곳곳의 산을 혼자 올랐다.

경성(서울)북쪽에 있는 북한산은 화강암층의 넓적한 슬랩이 많아서 루트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만만치 않은 산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즈미가 등산 활동을 시작한 시기 한반도에서 활동한 조선학생산악단체들은 1928년에 창립한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의대). 배재고보. 경신고보. 1931년에 창립한 연희전문(. 연세대). 1937년에 창립한 양정중학.1938년에 창립한 보성전문(현 고려대)산악부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등반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독학으로 암벽등반의 기초를 배웠다. 조지D.아브라함 George Dixon AbrahamThe Complete Mountaineer을 교재로 활용 자일 묶는 법과 하켄, 카라비너 사용법. 하강방법 등을 책을 통해 독학하며 실행했다. “나는 책으로 등반을 배운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전혀 모르는 미지의 기술을 하나씩 습득해 가는 것은 그것 자체가 탐험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독학으로 배운 암벽등반기술이 차츰 발전하면서 인수봉을 등반했고. 중학 3년 재학 중에는 백운대를 원래 있던 루트대로가 아니라 남쪽 정면에서 하라 마사노리. 사카이등 두 명의 학우들과 함께 등반한다. 그들이 이룩한 직등은 힘든 초등반 이었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 진학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스키산악부를 설립하고 1935년엔 경성제대 학생산악부를 만들어 1945년 패전으로 경성제국대학이 폐교가 될 때 까지 한반도내에서 등반활동을 한다.

 

금강산 집선봉 암벽과 북조선의 산들.

그는 경성근교 산에서의 활동을 점차 북조선의 산으로 확대해나간다.

마침 그 무렵 조선거주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산악회(1931)가 결성된다. 중학생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경성제대 예과의 다케나카요(竹中要)교수와 조선철도국에 근무하는 이야마를 알게 된다. 당시 조선산악회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은 이야마가 유일했으며, 그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북조선의 산에서 괄목할만한 암벽등반을 한다. 이 책에 수록된 27컷의 귀중한 사진들은 조선의 산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사진자료를 남긴 등반파트너 이야마(飯山)의 작품들이다. 이 책의 표지사진 금강산 집선봉 C2(960m)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적설기 묘향산. 금강산 집선봉(集仙峰)동북릉S-2. 채하봉. 두운봉. 차일봉. 관모연산. 부전고원. 백두산. 지리산과 한라산 등지에서 암벽등반과 동계등반에 열중한다.

경성제대 재학 중에는 격렬한 암벽등반과 적설기 등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19343월에는 적설기 관모봉 첫 등정을 시도해 성공한다.

그가 금강산 첫 산행을 경험한 것은 1932년이며, 이즈미와 그의 동료들이 겨울 산에도 차츰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거대한 암벽군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집선봉(1355m)능선에는 수많은 암봉(피나클)이 있고 북면에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큰 암벽이 노출되어있다. 이 암봉군을 그 지방 사람들은 집선봉이라 불렀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암봉들은 근대적 암벽기술이 없이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였다. 수년 동안 집선봉은 이즈미의 산이었다. 북조선의 산들과 북만주 다싱안링(大興安嶺)과 몽고(蒙古)를 떠돌다 지쳤을 때도 늘 집선봉의 암벽을 찾았다.

이 때 오르지 못했던 S2봉과, 채하봉의 험난한 북벽도 올랐고, 한겨울에 S1봉의 안부에서 며칠간이나 보낸 적도 있었다. 또 예과 독일어 교사로 있던 크리스천 후퍼(Christian Hupfer)가 돌로미티에서 하는 암벽등반의 시범을 보여준 것도 이 집선봉이다. 이즈미는 1941년 이후 집선봉을 찾지 않았다.

.조선에서 겨울산행이 시작된 것은 그가 금강산을 찾기 3년 전인 1929년부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야마(飯山)와 이누마(飯沼)가 내금강과 외금강에서 비로봉 등반에 성공한 것을 겨울 산행의 시초로 보고 있다.

 

전후 고산등반 바탕 된 백두산 최초동계극지법등반

1934년 말에서 1935년 초에 걸쳐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박사를 대장으로 하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산악부가 극지법방식(極地法方式)으로 겨울백두산 등정에 성공했다. 이산은 등반이 어려운 산은 아니지만 접근거리가 길고 겨울철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고도의 시스템과 장비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다.

이 때 최초로 극지법(極地法)방식이 조선의 겨울 산에서 실행된다. 천막, 의복, 신발, 식료 그 외에 새로운 방식의 채용이었다. 그 후 일본에서의 등반기술은 이 원정을 계기로 크게 진일보한다. 전후(戰後)히말라야원정이나 남극탐험도 그 근원이 백두산의 경험 위에 쌓인 것이다. 이등반대의 보고서는 타의 규범이 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이즈미는 이 잘 준비된 원정 체계를 경성에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선거주 지역민으로서 동계 백두산 등반이 일본 국내 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유감이었지만 발족한지 얼마 안 되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스키산악회의 실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거주 일본산악인들은 장비며 여력이 부족했던 탓에 많이 부러웠을 것이다. 1931년에 창설한 조선산악회에 비해 1905년에 창립한 일본산악회와는 26년이라는 수준의 격차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본국 등반대의 대원정을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북조선의 산들을 자기 수준에 맞게 등반했다.

 

항일 빨치산의 무대. 백두산

이즈미가 북조선의 여러 산에 몰입하던 시기 백두산일대의 조선과 만주국국경지대는, 조선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빨치산과 비적(匪賊)이 출몰 중이었음으로 단독 산행은 불가능했다. 국경경비대와 동행하는 형식으로 백두산을 등반했다.

혜산진에서 포태리胞胎里까지 차로 이동 후. 끝없는 삼림 속을 걷던 중 들른 빈집 벽에 김일성은 일주일 후에 온다.라고 한글로 쓴 글씨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당시에 김일성은 국경 빨치산의 지휘자로 일본 정부의 눈엣가시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인민공화국의 수석인 오늘날의 김일성과 당시 백두산 귀신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김일성이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경성제대 재학 중에는 격렬한 암벽등반과 적설기 등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1934년에는 관모봉 첫 종주등반을 시도해 성공한다.

북조선에서 마지막 추억이 된 산행은 1936~1937년 동계에 있었던 관모연산의 민막골(民幕谷)등반이었다. 그는 설령(雪嶺)을 거쳐 관모봉을 등정했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 산악부 원정대도 관모봉을 오른다.

 

제주도 한라산

그는 19361월에 일어난 한반도 조난기록 1호가된 마에가와(前川)조난사고 당시 경성제대 한라산 적설기 등반대의 대장이었다. 이 사고는 강풍과 폭설이 요인이 되었고 조난대원의 시신은 5월에 발견된다. 경성제대 산악부의 제주도 원정은 대원 한 명의 죽음으로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이 사건은 이즈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신방들을 알게 되고 조선의 샤머니즘을 접한다. 이것이 일문학이던 전공을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탐험이나 조사, 발굴. 야외답사가 선행되는 학문은 문헌에 질질 끌려 다니는 학문과 비교하면 나의 성격과 맞았기 때문에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한라산에 오르다 친구를 잃은 조난사고를 계기로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고, 제주에 관한 관심은 계속 이어져 죽기 한 달 전까지 제주도를 방문 연구한 학문적인 결과물이 제주도/1966. 이즈미 세이치의 '제주도'1935~1965년까지 30년에 걸친 역사상 가장 격심한 변동기였던 제주도의 30년을 기록으로 남긴 보고서이다. 제주도의 지질과 동식물 분포 같은 자연환경에서 신화와 역사, 사람들의 의식주를 비롯해 종교, 언어, 풍습, 관혼상제 등을 망라했다. 이 책은 제주학 개론의 사실상 첫 번째 총체적 보고서이다.

산악인으로서 제주도에 관한 학문적인 접근을 한사람은 濟州道資料集.1971제주도 방언집등 제주도 문헌집을 펴낸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한 석주명(나비박사)이 있지만 외국인이 제주도를 연구한 보고서는 이즈미가 최초다.

등산에서 탐험으로

패전 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메이지대학과 동경대학 문화인류학교수를 역임한다. 교수 역임 동안 광범위한 연구조사 활동을 펼친다. 조사지역은 한국의 제주도, 중국 북쪽 싱안링(興安嶺)인 동아시아에서 서쪽 뉴기니와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안데스지방에까지 이르고 있다. 만년의 연구는 안데스 고대문명의 발굴에 집중해 10년간에 걸친 조사를 벌였으며. 그 성과로 페루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주요 저서에는 안데스 관계 영문 보고서 외, 아마존(1954), 잉카 제국(1959) 등이 있다. 이즈미가 남긴 문화인류학의 업적은 이 방면의 세계적 권위로 인정받는다. 한국번역본 제주도/김종철 옮김. 여름언덕2014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산과, 산의 연장으로서의 탐험을 축으로 하는 인생을 살았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는 등산에서 탐험으로 그의 활동 중심이 옮겨갔던 시절이다. 1936년의 북중국 여행부터 시작하여 1937년의 송화강(松花江)유역 조사, 1938년의 소오대산 및 몽골 학술탐험, 1943년의 뉴기니 학술조사, 1943년의 다싱안링 오로촌 조사, 및 몽골 오르도스 조사, 그리고 1945년에 북중국으로 갔으니 전혀 쉴 틈이 없었을 정도였다. 한국의 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인 이즈미 세이치泉靖一,

그의 생애는 등산. 학술조사. 탐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 인생과 한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청춘을 불살랐던 조선의 아득한 산들을 회상하며 1970년에 영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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